不受偏愛偏惡曰仁
불수편애편오왈인

不受專强專便曰禮
불수전강전편왈예

不受全是全非曰義
불수전시전비왈의

不受恣聰恣明曰智
불수자총자명왈지

不受濫物濫欲曰信
불수남물남욕왈신





[음훈]
惡 - 미워할오
强 - 강할강. 힘쓸강, 억지로할강
偏 - 치우칠편
專 - 오로지전
全 - 온전할전. 모두전
恣 - 마음대로자. 제멋대로자
濫 - 넘칠람

[분석]
* 受 (수) ~ 받을수.  여기서의 쓰임은 ‘받는다’라는 동사이며 ‘他人不受 ~ ‘ 가 원래 문장이고, 주어인 ‘타인(他人)’이 생략되었다.   ‘(타인이) ㅇㅇㅇㅇ를 받게 하지 않는것이 ㅇ 이다’ 라고 해석해야한다. 결국 ‘(타인이) 받는다’ 라는 의미는 ‘(자신이) 주다(授)’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준다’라고 했을때는 주는 사람 위주의 관점이지만 ‘받게되다’라는 것은 받는 상대방이 위주의 관점이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授(줄수)가 아니라 受(받을수)를 쓰신 것이다.
受(수)의 의미를 '사랑'을 예로 살펴보면, 갑(甲)이 을(乙)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랑이 아니라, 을이 갑(甲)에게 사랑 받는 마음이 있어야 사랑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기준이 아니라 타인이 기준이다.

* 愛,惡 (애,오) ~ 사랑함과 미워함

* 是,非 (시,비) ~ 옳음과 그름

* 强,便 (강,편) ~ 억지로함과 편할대로함

* 聰,明 (총,명) ~ 귀밝음과 눈밝음. '총명(聰明)'이라는 단어에 꽂히면 해석 안된다. 앞서 愛+惡, 是+非, 强+便 처럼 반대말을 연결하였기에 聰+明 이라고 보아야 한다.  귀는 소리를 느끼고 눈은 빛을 느끼므로 귀는 무형(無形)을 판별하고 눈은 유형(有形)을 판별한다. 귀는 수동적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눈은 능동적으로 습득한다.  '총(聰)'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에서 들려오는 타인들의 소리라는 의미에서 '객관적, 보편적(=여론.與論)'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명(明)'은 나의 의지대로 원하는 것을 살펴보는 '주관적, 특수적(=사견.私見)'이라는 의미이다. 
즉 총(聰)과 명(明)이 '머리가 좋은 것'은 공통적이지만, 주위 환경과 분위기를 관찰하여, 현실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판별해 내는 것이 '총(聰, 귀가 밝음)'이고, 내가 가야할 길과 해야할 일 즉 해결책을 잘 찾는 것이 '명(明, 눈이 밝음)'이다.

* 物,欲 (물,욕) ~ 재물과 욕심. 앞의 4가지는 대체로 반대되는 개념들을 모아 놓았으므로 물(物)과 욕(欲)도 반대말로 풀이하여야 할 것이다. 서로 믿는 사이에는 편의를 제공받고 그에 대한 답례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금품(物) 제공과 요구(欲) 사항은 한쪽으로 지나치지 않아야 하며, 이 기준은 당연히 상대여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조그마한 부탁을 하면서 큰 재물을 제공하면 대체로 부담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범죄에 연루되거나, 과다한 요구를 하기위한 사전작업일 수 있기 때문에 경계심만 더할 뿐이다. 또한 주는 사람이 어리석기도 한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지나친 요구를 하면서 그에 대한 보답을 인색하게 한다면 상대를 무시하는 처사이기에 믿음의 관계를 지속할 수가 없다. 

* 偏,全,專,恣,濫 (편,전,전,자,람) ~ ‘(한쪽에만) 치우친다, 과다하다’라는 뜻을 공통으로 내포한다. 한시(漢詩)에서 같은 위치에 똑같은 글자를 쓰기 보다는, 비슷하거나 대립하는 글자를 서로 댓구하도록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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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不受偏愛偏惡曰仁 (불수편애편오왈인) ~ 인(仁)을 행함에 있어서 타인이 느끼기에 타인을 필요이상으로 지나치게 사랑한다거나 미워한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아야 인(仁)이라 말할수 있다. 사랑(愛)과 미움(惡)은 주로 감정에서 나오는 반면, 어진 마음(仁)은 이성(理性)적 판단에서 나온다. 상대에 대한 선입견 감정(愛,惡)이 잠재되어서 판단이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느낌을 상대가 느끼게 된다면 어진(仁) 것이 아니다.

* 不受專强專便曰禮 (불수전강전편왈예) ~ 예(禮)를 행함에 있어서 타인이 느끼기에 필요이상으로 억지로 한다거나 너무 편할대로만 한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아야 예(禮)라고 말할수 있다.  예를 행하되 억지로(强) 한다거나 편할대로(便) 한다는 느낌을 상대가 느끼면 예(禮)가 아니다. 

* 不受全是全非曰義 (불수전시전비왈의) ~ 의(義)를 행함에 있어서 타인이 느끼기에 타인을 실제보다 지나치게 옳다고 하거나 그르다고 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아야 의(義)라고 말할수 있다. 친한 사이라서 무조건 옳고(是) 친하지 않아서 무조건 그르다(非)라는 느낌을 상대가 받게 된다면 의(義)가 아니다.  상대와의 친분, 지위 등에 따라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달라짐을 상대가 알수 있을 정도가 되면 '의(義)'롭지 않은 것이다.

* 不受恣聰恣明曰智 (불수자총자명왈지) ~ 지(智)를 행함에 있어서 타인이 느끼기에 너무 제멋대로의 일반적이거나 너무 제멋대로의 주관적인 사견만을 내세운다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아야 지(智)라고 말할수 있다. 문맥상 인의예지신은 모두 타인을 상대로하는 마음이다. 따라서 '지(智)'의 의미도 개인적으로 스스로 많이 알고 많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아는 바를 타인에게 조언(助言)하거나 가르치는 것'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타인에게 나의 생각을 전할 때에 너무 보편적(일반적) 의견을 제시하거나 반대로 너무 자의적(특수적)이라는 의견이라는 느낌이 들게 하면 지(智)가 아니다

* 不受濫物濫欲曰信 (불수남물남욕왈신) ~ 신(信)를 행함에 있어서 타인의 입장에서 금품을 과다하게 제공받거나 요구를 과도하게 받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아야 신(信)이라 말할수 있다. 서로 믿는 사람에게는 자그마한 부탁을 할수 있지만, 이 때 금품이 적절한 수준을 넘지 않고 요구 또한 지나치지 않아야 서로의 믿음에 금이 가지 않고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 적당한 정도 이상으로 주는 것은 뇌물이지 선물이 아니며, 법을 어기거나 패가망신할 수 있는 무리한 요구를 할 때에는 과도한 금품을 제공(=남물, 濫物)할 것이기에, 받는 사람이 부담스러울수 있다. 과도한 금품과 함께 과도한 요구(=남욕, 濫欲)를 해서도 안된다. 더불어 요구한 것에 비해서 재물이 아까워 인색한 성의 표시를 해서도 안되지만 본 구절에는 해당되지는 않는다.
현대 사회는 물(物)은 금전(金錢)인 경우가 많고, 욕(欲)은 재화(財貨)이거나 노무(勞務)인 경우가 많다. 적절한 금전이나 금품을 주고, 물건을 구입하거나 타인의 일손을 쓰는 것이 이 문구에 해당한다고 보여진다.
예를들어 불법으로 통장 입금된 돈을 은행인출기에서 찾아오면 고액을 주는 일자리가 있다. 일에 비해서 과다한 수고비(濫物)를 주는 것은 범법행위일수 밖에 없다. 인건비를 너무 박하게 주면서 일을 아주 많이 시키는 경우(濫欲)에 다음에는 거래가 거의 깨어질 가능성이 많다. 둘다 신용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해석]
편애편오하는 느낌받지 않게 하여야 인이고
전강전편하는 느낌받지 않게 하여야 예이고
전시전비하는 느낌받지 않게 하여야 의이고
자총자명하는 느낌받지 않게 하여야 지이고
남욕남물하는 느낌받지 않게 하여야 신이다

[해설]
이 구절은 공동체 상호간에 지켜야하는 도리를 요약하신 것이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모두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반드시 상대가 존재하는 개념이다. 특히 '智' 도 개인적인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공동체 상호 관계를 위한 지혜를 가리키는 것이고 '信' 또한 개인적인 믿음이 아니라 공동체 상호간의 믿음인 것이다.

공동체 상호간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행함에 있어서의 기준은 내가 어떻게 행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며 사사(私事)로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이 문구의 강조점이다. 인의예지신은 상대방 기준에서 볼때에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는 범위 내에서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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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受偏愛偏惡曰仁 (불수편애편오왈인)
어떤 사람은 무슨일을 해도 예쁘다거나 또는 미웁다거나 하는 선입견을 가질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이 행동이나 말투에 드러나도록 하면서 상대를 대하는 것은 어진 것이 아니다. 혹시 그렇더라도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는 느낌을 상대가 받아야 어진 마음이다.  
예를들어 학교폭력이 문제가 되는 경우 대체로 가해자는 사회 유력인사의 자식인 경우가 많고 피해자는 힘없는 일반시민의 자식인 경우가 많으며, 처리 결과도 사회유력인 자식인 가해자에게는 너무 약한 처분이 내려지고, 피해자에게는 가혹한 처분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다.  반대의 결과는 아주 쉽게 해결이 되어서 뉴스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결과가 생기는 이유는 학교 교장 이하 징계 관련 모든 교직원이 사회 유력한 사람의 자식에게는 편애(偏愛)하는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힘없는 일반시민의 자식에게는 편오(偏惡)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권력, 돈, 자신에 돌아올 이익 내지 불이익 등 때문에 어진마음(仁)을 버리고 판단한 결과이다. 제3자가 입장에서 보면 누구든 이러한 것이 쉽게 느끼는데 그들은 아닌 척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인(仁)이 없는 금수(禽獸)가 인간(人間)을 교육한다고 설치는 꼴이다. 가해자 또는 피해자 학생에게 이러한 편애(偏愛)와 편오(偏惡)의 선입견이 느껴진다면, 처분에 관여한 사람 모두가 어진 마음(仁)이 없는 것이다. 

不受專强專便曰禮 (불수전강전편왈예)
상대방에게 예의(禮)를 표함에 있어서 억지로(强) 한다거나 편할대로(便) 한다는 느낌이 상대방이 들게 된다면 예의가 아닌것이다. 받아들이는 상대를 기준으로 볼때 너무 까다로운 격식을 내세우거나 아무 격식도 없이 편할대로만 하여서는 무례(無禮)한 행동이 된다. 
예를들어 상대가 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 예절로 존중하는 것이 옳고, 상대가 불교인이라면 불교 예절로 존중 하는 것이 옳고, 상대가 유교인이라면 유교 예절로 존중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기독교인이 제사에 참석해서 억지로 면서 싫은 티를 내는 것(强)도 문제이지만 큰절도 않고 찬송가 노래하는 것(便)은 예의가 아닌 것이다. 예(禮)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과 행동인데, 상대를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한다면 예(禮)가 아니다. 상대를 존중한다면 상대가 원하는 행동과 말투를 하는 것이 예의(禮儀)의 기본이다.

不受全是全非曰義 (불수전시전비왈의) 
상하간이나 동료간에 의리(義)를 지킨다고 할 때, 친한 사람이라고 상대방이 무조건 옳다거나 친하지  않다고 무조건 그르다거나 한다라고 하는 느낌이 들게 해서는 의리가 없는 사람이다. 상대방에 지나치게 동조하는 것은 도리어 아부나 복종에 가깝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옳고 그름(是非)에 대한 기준은 이성적 판단에 따라야지, 친소(親疎-멀거나 가까움) 관계라는 감정에 휘둘리면 안된다. 
예를들어 자기가 속한 정당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고 다른 정당이 하는 것은 무조건 그르다 라는 사람은 의리를 모르는 사람이다. 잘잘못은 소속정당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건마다 도덕적 기준에 따른 이성적 판단으로 가늠해야한다. 이런 부류들은 '의(義: 옳고 그름)'를 모르는 개, 돼지와 같은 금수(禽獸)들이다. 
또한 일본이 하는 것 중 잘하는 것이 있을수 있고 잘못하는 것이 있을수도 있으며 이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사건마다 판단하는 것이 '의(義)'이다. 그러나 과거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 삼고 괴롭혔다는 선입견으로 인해 일본이 하는 것은 무조건 나쁘다 하는 것은 애국심이 아니라 '불의(不義)'한 것이며, 이 역시 금수(禽獸)들이다. 더우기 후쿠시마 원전 앞바다에 방출하고 있는 방사능 보다, 중국에서 서해로 방출하는 방사능이 많다. 우리 국민의 건강을 위한다면 서해의 닫힌 바다로 방사능을 배출하는 중국이, 태평양 열린 바다로 방사능을 배출하는 일본 보다 심각하다. 정치인들이 진정 국민들을 위한다면 중국 방사능을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이 '의(義)'로운 행동이다. 일본을 싫어하는 감정을 부추켜서 표를 얻으려 하는 것이 개, 돼지 같은 정치인들이 하는 짓이고, 이들에게 선동 당하는 국민들도 의(義)를 모르는 개, 돼지들이다.

不受恣聰恣明曰智 (불수자총자명왈지) 
지혜(智)를 전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일반적인 견해이거나 사견(私見)에 치우친다는 느낌이 상대방에게 느껴진다면 지혜라고 할수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타인의 특수성을 감안하고 거기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면  지혜라 할수 없는 것이다. 
예를들어 친구가 힘들다라고 호소할 때 '세계 경제가 안 좋아서 누구나 힘들어. 그러니까 너가 힘든 것은 당연해'(일반적) 라거나 '너가 너무 내성적 성격이라 힘드는 건 당연해'(특수적)라고 한다면 총명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비록 세상살이가 힘들고 성격이 내성적이라도 힘든 것을 넘길수 있는 적당한 방법을 찾아내어 상대에게 제시하는 것이 지혜(智)로운 것이다.

不受濫物濫欲曰信 (불수남물남욕왈신)
믿는(信) 사람을 상대할 때에도 상대방이 느끼기에 과다한 금품제공(濫物)이나 너무 과다한 요구(濫欲)를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요구를 받는 사람의 입장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특히 법을 어기는 요구는 당연히 범죄이면서 과다한 요구이므로, 해서도 안되고 받아도 안되는 것은 당연하다. 
알던 사람은 신(信)이 있고, 모르는 사람은 신(信)이 전혀 없는 관계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문구이다. 
아는 사람에게 어떤 부탁을 하는 경우에 적당한 요구와 함께 적당한 사례를 해야 상호 믿음이 생길 것임은 당연하다. 과도한 금품은 과도한 요구사항의 사전 포석이기에 상대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이 구절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성의표시가 상대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고 모자라게 되면, 다음에 똑같은 요구를 하더라도 상대는 요구를 거절할 가능성이 많기에, 서로의 믿음에 금이 갈 것임은 당연하며, 결국에는 서먹서먹해지고 모르는 남과 같이 되고 만다. 
요지는 상대가 느끼기에 적절한 금품과 적당한 요구를 해야 서로의 믿음(=信)을 유지 내지 발전시킬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입장에서 인의예지신을 다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의예지신을 행하는지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타인의 관점이 기준이어야 한다는 것이 상제님 말씀이다.

다시말해서 상대에 대한 자신의 편견과 사심을 최대한 배제한 마음(心)으로 상대를 대하여야하며, 상대가 가진 인의예지신 기준에 흡족할만한 정도에 맞추어 행동(行)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 상제님 말씀의 요지이다.